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츠시마 사건 (문단 편집) == 사건 이후 == 일본 육군은 [[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사건|자기들이 먼저 쳐들어왔다가 사상자를 남기고 부대로 퇴각했음]]에도 불구하고 "오우라 경찰부장이 경찰 편을 들어 부득이하게 후퇴했다"고 [[정신승리]]를 시전했고 경찰은 "군인들이 쳐들어 오길래 부득이하게 반격했다"고 반박했다. 사건을 해결한 오우라 경찰부장은 이후 [[높으신 분들]]의 신임을 얻어서 경시총감을 거쳐 내무대신까지 오르면서 승승장구했고 [[대한제국]] 정부로부터 [[대한제국 훈장|훈장]]을 수여받기도 했다. 사건 이후에도 육군과 경찰 간의 갈등은 해결되지 않았다. 50년 후인 [[1933년]]에는 '''또''' [[오사카 고스톱 사건|오사카를 배경으로 경찰과 군부간의 신경전]]이 벌어졌고 [[5.15 사건]]과 [[2.26 사건]]을 겪으면서 경찰관이 쿠데타군의 총격을 받고 사살되는 일이 빈번했으며 아예 [[2.26 사건]] 당시에는 쿠데타군의 주 타격대상에 도쿄 [[경시청]]이 포함됐을 정도였다. 물론 이때 경찰 소속으로 파견된 경호 인력들이나 쿠데타에 맞서던 경찰들은 대거 학살 수준으로 사살당했다. [[제2차 세계 대전]] 패전 하루 전날인 [[궁성사건]] 당시에도 [[황궁경찰본부]]가 반란 세력인 근위대에게 무장해제당하는 등 동네북처럼 다뤄졌다. 그러나 [[일본의 항복]] 직후 두 집단 사이에서 경찰의 입김이 세지자[*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었다. 전후에는 [[일본제국 경찰]]에게 시달렸던 일본인들이 경찰관을 상대로 보복성 행패를 부리는 일이 잦았다.] 경찰쪽에서는 [[일본군 패잔병]]들을 "그렇게 설치고 다니더니 결국 저 꼴이 났다"며 비웃거나 심지어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패잔병을 검문한답시고 구타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졌다. [[일본 경찰]]은 현대에도 공안경찰에 "자위대 감시반(自衛隊監視班)"까지 만들어 가면서 [[자위대]]의 [[쿠데타]]와 돌발 상황을 경계하고 있다. 경시청 관계자가 대놓고 5.15 사건과 2.26 사건을 언급하면서 "바보같은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'''[[전과(범죄)|전과]]'''가 있는 이상 가능성은 제로라고 할 수 없다고 봅니다"라고 할 정도이며 [[http://archive.is/dHNsW|#]] 2016년에는 [[시큐리티 폴리스]]가 2.26 사건 당시 순직한 경찰관들의 무덤을 참배하는 행사를 하기도 했다. [[https://policemaniacs.com/%E8%A6%81%E4%BA%BA%E8%AD%A6%E8%AD%B7%E3%82%92%E6%8B%858%E3%81%86sp/|#1]], [[http://archive.is/qhROD|#2]] 사고를 친 부대는 [[1888년]]에 육군 [[제4사단]]으로 개편되었고 [[청일전쟁]], [[러일전쟁]]에도 투입되었지만 러일전쟁 후에는 [[땡보|상비사단임에도 불구하고 1937년까지 전선에 투입되는 일이 전혀 없었다.]] [[1937년]] [[중일전쟁]]이 발발하자 [[관동군]]에 배속되어 중국 전선에 투입되었고 [[제2차 세계 대전]]에도 동원되어 당시로선 [[추축국]]이었던 [[쁠랙 피분송크람]] 치하 [[태국]]에서 패전을 맞아 해산, [[소집해제]]되었다. 이들은 [[태평양 전쟁]] 당시에도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이었던 '''[[방콕]][[땡보|에 주둔 중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에서 가장 전사자가 적은 부대]]'''였던 데다 [[http://blog.daum.net/shanghaicrab/11558763|귀국할 때 혈색이 너무 좋아서 군부의 배급 통제로 영양결핍에 시달리던 본토의 사람들이 놀랐다.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